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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蓋棺)하여 사방정(事方正)  
도시신문(http://sungnammail.co.kr)   
| 2006.06.06 16:16 |
-고(故) 오성수 시장 영전에-

한때 「한국의 잠농」으로 까지 추앙받던 오성수 전 성남시장이 별세했다.

개관(蓋棺)하여 사방정(事方正) 이라는 말도 있지만 죽어 관 뚜껑을 덮어야만 비로써 그 사람의 생전의 가치와 선악을 확인할 수 있다는 옛말이 실감나는 것은 오성수 전 시장의 빈 자리가 너무도 크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내가 오성수 전 시장과 인연을 처음 맺은 것은 이미 40여년전의 일이다. S 신문사 편집국장이란 직책으로 내무부를 출입하던 시절 오성수 전 시장은 내무부 산하의 관련 지도과장의 자리에 있어 그와의 교류가 있어지기 시작했던 것.

그러나 그와의 인연은 성남에서 다시 살아났으니 이미 18년전 도시신문이 창간되면서 였다. 도시신문의 창간되던 시절 성남시청의 도시신문에 대한 박대와 괄시는 대단했다.

성남 최초의 지역신문이라는 자부심으로 제작에 임하던 우리는 마치 오성수 시장을 탄핵의 목표로 삼은 듯 매호마다 성남시를 공격했다. 앙금은 날이 갈수록 쌓여만 갔고 그 와중에 성남시 경비원들은 본사 취재부장이던 윤모 부장을 집단구타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취재 나갔던 윤모 부장이 병원에 실려와 누워있게 된 것을 본 순간 나는 이성을 잃었고 그 즉석에서 오성수 성남시장을 고발했다는 내용의 사설을 집필하여 게재하기에 이르렀다.

오시장과의 사이가 극도로 벌어진 계기였다.

그날 이후 도시신문의 글은 점점 더 강성이 되었고 오시장과의 보이지 않는 전쟁은 날로 격화 되어갔다. 그 덕분에 광고수주 또한 엄청나게 힘겨웠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오성수 시장은 성남을 떠났고 떠난지 사흘 만에 성남시에 살고 있던 그의 추종자들과 남서울 골프장에서 골프예약이 되어 있는 것을 확인한 뒤 잠복 취재를 단행, 그의 사진과 더불어 일면에 대서특필했다.

광명시 관선시장 하던 시절에 그 기사는 오시장으로서는 치명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오성수 시장은 성남을 떠난지 2년여 만에 다시 성남으로 돌아왔고 1995년부터 98년까지 초대 민선 성남시장이 됐다.

그러던 1995년 8월 모 인사의 중재로 마침내 그와 독대하는 시간이 있었다. 오 시장은 이때 나에게 전직을 물었고 나는 S신문 편집국장이던 옛 기억을 털어 놓았다. 이때 오 시장은 성남시장 이전에 나를 모르느냐고 물었고 나는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오시장은 내무부때 모부서 과장이던 자신을 모르겠느냐면서 도시신문 창간때 이미 나를 알고 있었노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비로서 기억을 떠 올리며 오시장에게 손을 내밀었고 그렇게 둘은 뜨겁게 마주잡은 손을 한참 동안 놓을 줄 몰랐다.

그 후 나는 개인 오성수 시장의 면모를 긍정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했고 98년 구속 되었을 때 의정부 교도소까지 찾아가 면회를 하고 오는 인연이 되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오성수시장은 성남시민을 위한 열정 만큼은 대단하였던 것 같다.

무보증금 임대아파트와 서민편에 서고자했던 그의 열정은 장학금으로 나타났고 그의 시민사랑은 그 후에도 선거철만 되면 시민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지금도 오성수 시장이라면 자다가 벌떡 일어나는 시민이 한 둘이 아니다. 요즘에는 오 시장의 탱크행정이 쉽지 않겠지만 아무튼 그시절에 인기는 대단했었다.

그러나 그도 돈 앞에서는 어쩔수 없었나 보다. 민선 2기 시장선거에서 김병량시장에게 패하고 얼마 안돼 뇌물수수로 전격 구속이 되었다.

말년에 형 집행정지로 가석방 되어 당뇨 등에 시달리며 분당 어딘가에 살고 있음을 알면서도 찾아보지 못했던 내 양심의 한 구텡이가 따끈하게 아려온다.

고인이 되신 분이지만 그의 업적은 높이 평가해 주고싶다.
언론인/문흥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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